윤종신이 들려 줄 이방인의 노래 “미루고 미루다 이제 떠납니다”

2019.07.06 11:47 입력 2019.07.06 14:53 수정

윤종신(50)이 한국을 떠난다. 방송 활동도 접는다. ‘2020 월간 윤종신 이방인 프로젝트’(NOMAD PROJECT)를 위해서다. 그는 왜 ‘이방인’이 되려는 걸까. 누군가는 그가 자신의 노래 <탈진> 가사처럼 ‘드러누워 일어나기 싫은’ 상태라고 했다. 지난해 발표한 노래 <은퇴식>(2018 월간 윤종신 2월호)을 거론하는 이도 있었다.

1990년 데뷔 이래 대중 곁을 떠난 적이 없던 그였다. 1991년 <우리는 하이틴> (MBC 표준FM)의 풋내기 DJ였던 윤종신은 예능 메인 MC로 지금도 브라운관을 누비고 있다. 그의 음악도 건재하다. LP판에 담겼던 그의 노래는 카세트테이프와 CD를 거쳐 ‘월간 윤종신’이라는 이름의 디지털 싱글로 나오고 있다. 그렇게 늘 그 자리에 있을 것 같던 그가 떠난다니. 그럼 월간 윤종신은 ‘휴간’하는 건가. 그에게 직접 이야기를 들었다. 인터뷰는 7월 2일 서울 용산구 한남동 그의 작업실에서 이뤄졌다.

가수  윤종신.이상훈 선임기자 doolee@kyunghyang.com

가수 윤종신.이상훈 선임기자 doolee@kyunghyang.com

-지쳐서 쉰다고 들었다. 방송도 하차하고. 매월 발행하는 ‘월간 윤종신’은 중단하는 건가.

“전혀 아니다. 쉬려고 방송 그만두는 게 아니다. 오히려 ‘월간 윤종신’에 집중하려고 하차하는 거다. 다른 나라, 낯선 곳에서 ‘월간 윤종신’을 내려고 한다. 그래서 프로젝트 이름도 ‘2020 월간 윤종신 이방인 프로젝트’다. 갑자기 가는 게 아니라 3년 반 가까이 준비한 계획이다. 나가 있는 동안 글도 쓰고 다른 콘텐츠도 만들겠지만 가장 중요한 건 음악이다.”

-그간 활동을 접는다고 하니까 윤종신의 행보가 일단락되는 느낌이다.

“50이란 나이가 그렇다. 정리벽은 없는데. 리프레시할 타이밍이 온 것 같다. 젊은이라는 말을 붙일 수 있는 마지막 숫자가 50이다. 아직 좌충우돌할 수 있는 나이이고, 체력적으로도 문제없다. 60대에 떠나면 그때는 정말 은퇴 여행으로 보일 것 같더라. 지금이 딱 적당한 시기라고 본다.”

윤종신 노래에는 동네 골목길과 공원과 같은 일상 속 공간이 자주 등장한다. 퇴근길에 마주한 회색 대문도 그의 노래에서는 생명력을 갖는다. 그가 좋아하는 공간으로 꼽았던 종로 청운공원은 11집 <동네 한 바퀴>에 실린 곡 <야경>의 모티프가 됐다. 익숙한 장소와 소품으로 풀어낸 생활형 가사는 윤종신만이 쓸 수 있는 노랫말이다.

-‘공간’이 윤종신 음악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적지 않은데, 새로운 이야기가 나오겠다.

“오래전부터 지금 몸 담고 사는 공간을 바꿔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스물한 살에 데뷔해 이제껏 멀리 떠나본 적이 없다. 한 달간 다녀온 해외여행이 전부다. 새로운 감정을 느낄 공간, 창작의 모티프가 될 환경이 필요했다. 지금의 나는 50살의 가장, 서울에 거주하는 한 아저씨일 뿐이다. 할 수 있는 얘기가 별로 없다. 한 발 떨어져서 바라본 서울의 모습, 먼 곳에서 보고 느낀 걸 얘기해보고 싶다. 낯선 곳에서 나는 어떤 사람일까도 궁금하다.”

-여기저기 옮겨 다닌다고…. 녹음시설, 장비가 마땅치 않을 텐데 노래를 만들어 녹음해 발표할 수 있나.

“거주지에 녹음실이 없으면 방이나 집에서 하면 된다. 아주 최소한의 장비로도 녹음이 가능하다. 아주 고퀄리티는 아니겠지만 상관없다. 마이크를 가지고 가서 노래하고 데이터를 한국에 보내면 엔지니어가 받아서 작업한다. 일단 첫 행선지는 아이슬란드다. 커버 찍으러 가는 건데 다음 행선지는 아직 정하지 않았다. 정해진 건 2020년 1년 동안 떠돌아다니면서 노래를 만든다는 것 하나뿐이다.”

-해마다 콘서트도 꾸준히 해왔다. 출국 전 콘서트 계획은 없나.

“프로젝트 전 마지막 콘서트를 계획하고 있다. 서울을 포함해 전국에서 세 곳이나 네 곳 정도…. 나가 있는 동안은 당연히 콘서트 생각을 안 하고 있었는데, 해외공연을 해보자는 얘기가 나왔다. 일단 ‘계획해봐라’라고 말은 해놨지만 해외공연까지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콘서트 얘기가 나온 김에 묻자. 전에 청주 공연에 갔다가 놀란 적이 있다. 객석에 있던 오랜 팬을 알아보고 안부를 묻더라. 무대 가까운 곳도 아니었는데. 오랜 팬들 얼굴을 아직 기억하나.

“누구였더라. 아. 명선이 (웃음) 기억난다. 그 친구하고 몇 명은 기억한다. 나랑 몇 살 차이 안 나는 팬들이다. 무대에서 관객을 보는데 그 친구 얼굴이 보였다. 어떻게 저렇게 안 변했지. 정말 하나도 안 변해서 알아봤다. 당시 중학생이었던 친구들이었는데. 시간이 참 빠르다. 그때도 지금도 고맙다.”

30년차 가수 윤종신. 그간 많은 별이 뜨고 졌지만 그는 살아남았다. 가수 데뷔 1년 전만 해도 대학생 윤종신에게 음악은 ‘듣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1990년 015B 객원가수 시절 그에게 음악은 그저 ‘부르는 것’이었다. 1991년 윤종신 1집을 발매하면서 그는 싱어송라이터로 거듭났다. 그는 2018년에 발표한 <Slow Starter> 노래 가사처럼 ‘뭐든지 다 늦었고 뭐든 빨리 깨닫지 못한’ 사람이었지만 ‘아프면 아픈 얘기를 했고, 순간순간 자신의 이야기를 했다.’ 그가 흘린 땀은 증발하지 않고 차곡차곡 이야기들로 채워졌다. 2019년의 윤종신은 가수와 작사·작곡가, 프로듀서를 아우른다. 콘텐츠 창작자를 넘어서 지금은 ‘월간 윤종신’이라는 자신만의 플랫폼을 구축하기에 이르렀다.

가수  윤종신./이상훈 선임기자 doolee@kyunghyang.com

가수 윤종신./이상훈 선임기자 doolee@kyunghyang.com

-윤종신의 음악적 감수성 상당 부분이 스무 살 무렵 들었던 박학기와 조동익, 장필순, 김현철의 음악들로 이뤄졌다고 했는데. ‘하나뮤직’에 대한 갈망은 없었나.

“하나뮤직 뮤지션을 동경했고 갈망도 있었다. 하지만 (기획사) 대영AV에서 만난 (정)석원이형과 (신)해철이형이 내게는 더 매력적이었다. 하나 형들은 ‘딥(deep)’했고, 대영AV 형들은 재기발랄하고 커머셜했는데 나는 후자 쪽에 꽂혔다. 두 사람에게 정말 많이 배웠다. 생각하는 방법부터 콘텐츠를 만드는 것 전부 다 그들이 가르쳐줬다.”

-2015년에 고(故) 신해철의 추모곡으로 그의 노래 <고백>을 리메이크했다. 리메이크 작업에 정석원씨가 참여해서 화제가 됐다.

“해철이형 사고 소식에 석원이형도 충격을 많이 받았다. 그래서 같이 작업을 한 거고. 다들 둘 사이를 궁금해하는데 예전에 둘이 많이 싸운 건 사실이지만 서로 인간적으로 싫어한 건 아니었다. 스무 살 음악 잘하는 두 천재를 붙여 놓으니 싸움이 날 수밖에 없었다. 라이벌 의식도 있고. 그런데 뭐 석원이형도 장례식에 끝까지 있었다. 원래 그런 거 아닌가. 둘은 무한궤도 안에서 비틀즈의 존 레넌과 폴 매카트니 같았다. 해철이형이 존 같은 사람이었고 석원이형은 폴 같은 존재였다. 둘이 했으면 정말 ‘죽이는’ 팀이 됐을 텐데 그게 안 되더라.”

-30년차 뮤지션이 누군가에게 ‘배워서 컸다’고 얘기하기가 쉽지 않을 텐데 거리낌이 없다.

“배운 게 사실이니까.(웃음) 작사가 박주연까지 세 사람에게 많이 배웠다. 그런데 뒤에 꼭 내 자랑도 한다. 그들에게 배워서 나는 윤종신 음악을 한다. 그들에게 배워서 그들과 같은 음악을 하면 못나고 부끄러운 게 맞지만 난 내것을 만들어서 하고 있지 않나. ‘월간 윤종신’을 3년쯤 하고 나니까 해철이형이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월간 윤종신에 감동했다’고, ‘그거 시작한 거 잘한 거다’라고 왔다.(그는 지금도 신해철과 주고받은 문자를 모두 보관하고 있다.) 뒤에 ‘나도 비슷한 거 생각했었는데 니가 하니까 기분 잡쳐서 안 하련다’고 하더라.(웃음)”

-비슷한 맥락인데 살면서 느끼는 열등감이나 자격지심을 숨기지 않는다. 가사로도 곧잘 표현하는데.

“콤플렉스는 꺼내서 던지는 순간 사라진다. 말하는 순간 극복되는 거다. 그 사실을 깨닫기까지 오랜 시행착오를 겪었다. 마흔 살이 되고 어느날 ‘내 콤플렉스는 고민할 거리도 안 되는 것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개인의 세계라는 게 얼마나 좁은지 알게 됐다. 좁은 시야로 왜 그리 다른 사람을 판단했는지. 그때부터 남에 대한 판단은 안 하고 나 자신에 대한 판단만 한다.”

-언젠가부터 사랑보다 위로와 격려를 노래한다. 삶과 자아, 시간과 계절에 대한 시선을 담기도 하고.

“맞다. 그런데 요즘에 다시 발라드가 쓰고 싶더라. 이번 가을에 아주 옛날 느낌의 발라드를 한다. 이별 노래. 발라드가 내 전문인데 그간 너무 인생 위주로 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 경험만 고집하지 말고 소설처럼 사랑 이야기를 쓰려고 한다. 사실 내 노래는 나이가 없다. 듣는 사람들이 알아서 해석하고 받아들인다.”

-2017년 <좋니>의 성공이 ‘다시 발라드를 써야겠다’고 마음먹는 데 영향을 끼쳤나.

“꼭 그렇지는 않다. 다만 <좋니>가 잘돼서 ‘아 이별 노래를 내가 해도 되는구나’라는 생각은 들었다. 사실 <좋니>의 의미는 다른 데 있다. <좋니>는 입소문을 타고 역주행을 통해 히트한 ‘유행가’다. 몇몇 대형 플랫폼의 ‘실시간 차트 톱100’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음원시장에서는 기적과 같은 일이다. 청자(廳者)의 취향은 세분화되고 다양해지는데 음원 플랫폼들은 여전히 대중들에게 취향을 강요한다. 차트에 진입 못한 노래는 아예 대중의 관심을 받지 못한다. 소소하게 음악 만드는 사람들의 노래는 모두 묻히는 구조다. 꼭 윤종신 노래가 아니어도 상관 없다. <좋니>와 같은 유행가가 자주 나와야 한다.”

-윤종신의 행보를 어떻게 봐줬으면 하나.

“보는 분들 마음대로, 느껴지는대로 나를 기억했으면 좋겠다. ‘윤종신은 이런 사람입니다. 이렇게 느껴주세요’라는 말은 하지 않는다. 누군가는 싫어할 테고 누군가는 좋아할 것이다. 자유롭게 느끼는 그 감정이면 족하다. 사람들마다 마음속에 나름의 윤종신이 있을 텐데 그들의 윤종신을 인위적으로 바꾸고 싶지 않다. 각자 느끼는대로. 모두에게 자유로운 윤종신으로 남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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